시43 사기 [2005-05] 하루짜리 느낌을 끄적여 놓고 詩라는 이름을 붙이면 남들이 뭐랄지 뻔히 알면서도 기분은 좋다 [로스 안데스 문학 9호 수록] 시 2021. 3. 27. 기다림 [2004-12] 끝도 없는 우주 한 켠에 몸을 담고 오늘도 흔적을 남기려 애쓰는 이유는 희박한 가능성을 알면서도 어느날 그녀가 보리란 기대 때문이다 잡스런 글줄과 휴지도 못될 사진 몇 장으로 그녀가 나를 어찌 기억할지는 계산한 바 없고 다만 함께 사랑할 때 그러했듯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닿을 것을 믿기에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도 혹 남은 게 있다면 이미 나 세상 떠나고 없을지라도 여전히 사랑하는 날 느낄 수 있으리라 바라는 것 또는 그 무엇으로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그녀의 삶이 행복했다는 뜻이기에 여전히 숨쉬는 내 사랑과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릴 내 흔적들이 만나 하나의 별이 되어 다시 태어나리 기다림에 익숙한 나의 시간들이 또 흐르고 흘러 여정에 지친 그녀가 나의 별에 잠시 머문다면 - 역시.. 시 2021. 3. 23. 부에노스아이레스 3 - 비가 내린다 [2004-11] 비가 내린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내 눈물은 하늘로 흐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내리는 비는 어느날 내 고향 땅에도 이르리니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느날 사랑했던 그이 내 눈물을 보리 날 사랑했던 마음 그 한 조각 여전히 한 켠에 남아있다면 빗속에서 그 비를 맞으리 내 눈물을 맞으리 [로스 안데스 문학 9호 수록] 시 2021. 3. 23. 부에노스 아이레스 2 - 나는 검다 [2004-05-13] 나는 검고 검고 또 검어서 검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검고 흰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없지만 알 필요가 있고 없고는 검지 않는 것들의 문제다 말 한마디, 글 몇줄, 종이 한장으로 검은 것이 희어지는 세상에 살면서 내가 검다해서 어두운 곳만 찾아야 할 이유가 있나? 검은 것이 빛일 수는 없겠지만 흰 것 역시 빛은 아니다. 정작 빛은 가만 있는데 왜 흰 것이 검은 것을 나무라는지 모르겠다. 빛이 없으면 흰 것도 검은 것도 없는 걸 모르나? 시 2021. 3. 23. 作亂 7 [2004-02-18] 시를쓰고싶었다 그러나쓰고보면 언제나글씨에서 벗어나지못했다 이게아니었는데 그러면서또다시 글씨를적은거다 [로스 안데스 문학 9호 수록] 시 2021. 3. 23. 자화상 [2004-02-07] 내 골 안에는 두 개의 뇌가 있어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. 각각의 뇌가 각각의 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주장할 때면 정작 나는 내가 아닌 몸 한구석 어딘가 세를 얻은 사람이다. 하나가 빨간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날이면 또 다른 하나가 살인을 준비한다. 그럼에도 늘 미수로 그치는 것은 그 역시 나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럴싸한 핑계에서다. 그러나 나는 안다. 둘 중 누구도 그만한 용기가 없다. 그래도 검은 잉크로 쓴 쓰레기보다는 낫다는 강변을 간혹 해대지만 스스로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는 걸 우린 모두 안다. 모두가 평화로울수 있는 방법이 있을리가 없겠지만 각자는 나름대로 골몰하여 사실상의 자기생존을 도모한다. 언제고 두개골이 열리고 두개의 뇌가 공개되는 날 이들은 배심원 앞에서 자결하리라.. 시 2021. 3. 23. 고백 2 [2004-02-04] 그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진찰실을 나올 때에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. 수술복으로 몸을 가리고 침대에 뉘인채 끌려갈 때에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. 지겹도록 하얀색으로 치장한 방에서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여 힘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. 그리 무기력한 나를 알면서도 버려두고 떠난 그녀는 가는 길 울기도 많이 울었겠지만 끝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. 시 2021. 3. 23. 부에노스 아이레스 1 - 부고가 없는 도시 [2004-01-26]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부고가 없다. 한글신문, 스페인어 신문 신문마다 부고란 제목의 광고가 없는 날이 없지만 그 어디에도 내 이름 석자는 없다. 간신히 얼굴 익히고 사는 이웃이란 사람들의 이름에 은빛 살벌한 자물쇠만 몇겹인데 어느 틈바구니 내 이름을 밀어넣을 수 있다더냐. 고개만 들면 하늘만한 그리움 속에 외로이 서계신 부모님의 모습 '엄마, 먼저 가도 나 못가봐요.' 혼잣말로 중얼거리지만. '괜찮아 이눔아. 밥이나 거르지 말어.' 어머니의 대답에 뜨거운 눈물만 또 흘린다.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부고가 없다. 그런데도 나는 늘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손질해 두곤 한다. [로스 안데스 문학 8호 수록] 시 2021. 3. 23. 어머니 [2004-01-26]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단어가 어머니인줄 알았습니다. 그러나 지금 내가 아는 단어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입니다. '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' 시조를 읽으며 고개만 갸웃대었지만 그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 때 아닌 허기에 찬밥을 놓고 앉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목이 메어 눈물에 밥을 맙니다. 세상의 어느 새끼가 그 어미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만은 불쌍한 어머니 나 때문에 못드시고 나 때문에 속 썩으신 날들 되돌려 드릴 수는 없어도 그 사랑 조금이라도 갚아드릴 때까지 나와 살아주셨으면 하는 기도를 합니다. [로스 안데스 문학 11호 수록] 시 2021. 3. 23. 아버지 [2004-01-12] [ 존경하는 아버지께 ] 벌어진 두 어깨위에 빛나던 무궁화 꽃을 떼어 내릴 때에도 나는 몰랐다. 풀 먹인 하얀 셔츠에 줄 선 바지 마루 끝에 앉아 구두에 침을 발라 광을 낼 때에도 나는 몰랐다. 삿대질과 고함으로 처음 당신을 대적하던 날 홧김에 내려치신 따귀가 하나도 아프지 않아 나는 울었다. 늘 부럽기만 했던 굵은 팔뚝이 이제는 나보다 가늘어 보이는 게 너무 슬퍼 포장마차에서 소주병을 비우고 비척이며 들어선 신림동 단칸방 수척한 모습으로 주무시는 듯 자는 척하는 술 취하신 당신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. 당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기도 버거운 자리에서 두 눈이 짓무르도록 속울음을 삼켰을 당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보았다. 성난 군중을 진정시키려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던 예.. 시 2021. 3. 23. 이전 1 2 3 4 5 다음